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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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도회 7선조 성인

* 7성인 이름 : 성 본필리오, 성 보나준타, 성 마네도, 성 아미데오,
                    성 우구쵸, 성 소스데네오 그리고 성 알렉시오 팔코니에리

* 축일 : 2월 17일


칠성인

 창설자 7성인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면서 세나리오산에서 은수 생활을 하다가

 토스카나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전교했고, 성모의 종 수도회를 창설하여 1304년 사도좌의 인준을 받았다.

그들의 축일은 창설자 7성인중 하나인 성 알렉시오 팔코니에리가 1310년에 세상을 떠난 날이라고 전해지는

2월17일에 지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에 따라 살며 마리아의 종들이란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대 수도회는 과거의 여러 수도원보다는 프란치스코회의 청빈 생활에 더 가까운 생활 형태를 취했다.

대 수도회는 이탈리아와 유럽에 널리 퍼졌으며 

베네딕토 11세께서는 1304년 이들을 ’마리아의 종’ 수도회로 부르게 하였으며,

레오 13세는 이 일곱 수도자를 1888년 1월 12일에 성인으로 공표했다.

<마리아의 종 수도회의 기원에 대한 전기에서>
(Monumenta Ord. Serv. B. Mariae Virginis, 1,3.5.6.9. 11, pp. 71 ss.)  성무일도 제2권 중에서

 

거룩한 분들을 찬양합시다.

피렌체에서 온갖 공경과 명예를 받기에 합당한 일곱 분이 있었다. 그들은 형제적 우애로 결합되어 같은 이상을 찾고 있는 분들이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흡사 하나의 성좌를 이루기 위해 모으신 일곱 별과도 같이 이 일곱 분을 모아 당신 자신의 수도회인 성모의 종 수도회를 세우셨다. 내가 이 수도회에 입회했을 때 일곱 분 중 알렉시오라고 하는 형제 외에는 생존해 있는 분이 없었다. 성모님은 우리 수도회가 어떻게 창립되었는지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도록 오늘까지 이 형제의 육신적 생명을 보존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이 형제는 내 눈으로 직접 본 바와 같이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거룩한 모범으로써 착한 생활로 이끌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생활로써 자신과 첫 형제들이 이룬 완덕 및 수도회 초기에 있어서 생활의 경건함을 증거해 주었다. 공동 생활을 시작하기 전 그들의 생활 형태를 다음 네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첫째로, 교회와 관련해서 보자. 어떤 이들은 평생 동정의 생활을 하느님께 서원한 이들이었고, 어떤 이들은 혼인 계약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아내를 여의고 혼인 계약에서 해방된 이들이었다.

둘째로, 그들의 직업을 보자. 그들은 모두 상인들로서 현세 사물의 매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값진 진주 곧 우리 수도회를 찾았을 때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큰 기쁨으로 자신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바치고 그분들을 충실히 섬기기 시작했다.

셋째로, 동정 마리아께 대한 공경과 신심을 보자. 피렌체에는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기 위해 설립된 오래된 단체가 하나 있었다. 오랜 전통과 거기에 속한 남녀 회원들의 많은 수효와 그 성덕 때문에 그 단체는 다른 단체들보다 더 알려지고 더 위대한 칭호를 갖고 있었다.
그 단체는"대 성모회"라 했다. 우리가 언급한 이 일곱 분은 함께 모이기 전에 동정 마리아를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이 단체에 속해 있었다.

넷째로, 그분들이 이룬 완덕을 보자. 그분들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했고 모든 생각과 언행에서 하느님을 경배했으며 주님을 섬기는 데에 생활 전체를 바쳤다. 공동 생활을 하기로 확고히 결의한 후 하느님의 감도와 성모님의 부르심으로 자신들의 집과 가족들을 떠났다. 가족들에게는 필요한 것만을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다음 슬기롭고 모범적인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계획을 말해 주고 성실히 조언을 구했다. 그 후 세나리오산에 올라가 산꼭대기에다 알맞는 작은 집을 하나 짓고 거기서 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분들은 자신들만이 성덕에 도달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므로, 자신들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께서 세우실 이 새로운 수도회가 커지도록 다른 사람들도 이 공동체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들은 새 회원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고 또 몇 명을 받아들여 우리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 수도회는 시초부터 성모 마리아께서 세우신 것으로서 형제들의 겸손으로 기초가 놓여졌고 형제들의 사랑으로 건립되어 그들의 가난으로 보존되었다.


St. Fillippo Benezi(성 필립보 베니찌) 축일 : 8월 23일


성 필립보 베니찌이탈리아의 플로렌스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와 파두아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과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그는 즉시 플로렌스에서 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 일년을 일한 후, 몬떼 세나리오에 있는 성모의 종 수도회에 입회한 것이다.
그는 1258년에 사제가 되었다.그 후 그는 설교로 더욱 유명해졌고, 나중에는 총장까지 되었다.
그는 수도회의 회칙을 제정하였고, 오또부오니 추기경이 그를 교황 후보자로 추천하였을 때,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어느 동굴에 숨어 살았다.
그는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여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성녀 율리아나를 도와서 성모의 종 수도회 3회를 창설토록 적극 지원하였음은 물론, 회원들을 극동의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1285년, 그는 총장직을 사임하고는 또디 수도원에서 은거하다가 운명하였다. 1671년에 시성되었다.


St. Giuliana Falconieri(성녀 율리아나 팔코니에리) 축일 : 6월 19일

성녀 율리아나 팔코니에리

성녀 율리아나 동정은 성모의 종이라는 수도원의 일곱 창립자들이 플로렌스에 남자 수도원을 세웠을 때, 같은 목적 하에 여자 수도원을 시작한 분이다.

그녀는 1270년 이탈리아의 귀족 Falconieri(팔코니에리)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때까지 오랫동안 자녀를 얻지 못하던 양친은 기쁨에 넘쳐 하나의 훌륭한 성당을 세워 그리스도교에 봉헌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지금도 율리아나의 묘소로 알려져 있는 성모 영보의 성당인 것이다.

율리아나는 외동딸이었으므로 양친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으며 교육도 특별하게 정성을 들여 교회의 정신을 따라 베풀어졌는데, 16세를 맞이하자 양친은 그녀에게 적합한 배필을 맞아 들여 가문을 계승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본래 신심이 두텁고 현세의 재물이나 쾌락을 찾는 마음이 없었던 율리아나는 일생을 예수의 배필로서 봉헌하겠다고 마음을 다해 간청했으므로 양친도 상의한 끝에 드디어 그녀의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동정의 서원을 발해 성모의 종 수도원의 총장인 필립보 베니시오로부터 제3회원으로 입회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후부터 율리아나는 그대로 가정에 있으면서 베니시오에게 지시 받은 규율을 따라 수도 생활에 노력해 왔는데, 130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0년이 지났을 무렵, 같은 의사를 가지게 된 동정녀들과 함께 비로소 공동체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는 언제나 자매들의 말석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원장의 중책을 맡아 어머니로서 모든 수녀들을 돌봐주고 실천함으로써 그들에게 좋은 표양을 주고, 어떤 때는 종과 같이 행동하며 그들을 위해 힘썼다.

또한 율리아나는 성모의 종 수도회와 비슷한 복장을 했으므로 "망토 수녀회(Mantellate)"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의 수도회가 정식으로 승인 받은 것은 120년 후이다. 율리아나는 자선의 행위를 매우 존중하여 규율속에도 이를 첨가했으며 때로는 그 자신이 틈이 없을 때에는 동료 수녀를 보내 플로렌스 시의 병자를 위문했다.

고행에 대해서도 비상한 열심을 드러내 단식재를 지킴에 있어서도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은 전연 음식물을 취하지 않고 토요일에는 음식물을 아주 조금밖에 취하지 않음으로써 철저히 이를 행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는 회칙에 정해진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진해 여러 가지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

이같이 극기 수도하기를 37년, 71세의 노령에 도달한 율리아나는 위염을 앓게 되어 중태에 빠졌는데 토사가 심했으므로 영성체도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뜻이 간절해 사제는 어떻게든 그녀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누워있는 그녀의 가슴에 성체포를 깔고 그 위에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모셔 놓았다. 율리아나는 경건히 그를 조배하고 영적으로 성체의 주 예수와 일치하여 화색을 띠며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1341년 6월 19일의 일이었다.후에 사람들은 성녀의 유해를 씻으려고 했을 때, 그 가슴에 뚜렷이 성체의 형제가 ,거기에 그려져 있는 십자가까지도 명백히 찍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St. Pellegrino Laziosi(성 페레그리노 라치오시) 축일 : 5월 4일

성 페레그리노 라치오시


이탈리아 포를리(Forli)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펠레그리노 라치오시(Pellegrino Laziosi)는

 젊어서 한때는 로마냐(Romagna)의 반 교황당에서 적극 활동하다가 성 필립보 베니찌(Philipo Benizi, 8월 23일)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시에나(Siena)의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여 고향으로 갔으며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설교, 고행, 성덕 그리고 고해신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의 발에 있던 암이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암환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그는 170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St. Antonio Maria Pucci(성 안토니오 마리아 푸치) 축일 : 1월 12일

성 안토니오 마리아 푸치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푸치(Antonius Maria Pucci,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피스토이아(Pistoia)의 포지오네(Poggione) 출신으로 어느 가난한 농부의 일곱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고,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마음이 유순하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던 그는 특히 본당 일에 열성이었다.

 1837년 그는 피렌체(Firenze)에 있는 성모의 종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그때 안토니우스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평수사이던 그는 매우 정직하고 모범적인 생활 태도로 말미암아 동료들 가운데서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사는 기도와 순종이었고 그 다음이 공부였다. 이윽고 그는 1843년에 사제가 되자 조그마한 항구인 비아레조(Viareggio)의 본당신부가 되어 일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주민들은 그를 ''작은 거인''으로 불렀다. 그는 본당의 요구가 있으면 무슨 단체든지 조직하였지만,

 항상 거룩한 사랑의 생활이란 목표를 뚜렷하게 심어주었고, 자신이 먼저 모범적인 삶을 보임으로써 신자들도 본받게 헸기 때문이었다.
1854년과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의 사랑은 더욱 돋보였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직접 간호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어린이와 청년들의 교육을 위한 봉사대를 발족시켜 본당사목의 본보기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민들의 사제''였다.
그는 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B. Ferninando Maria Baccilieri(복자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축일 : 7월 1일

복자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이탈리아 대주교 바로키 추기경은 “그는 Ars(아르스)의 성자(dygks 비안네)에 비길 수 있다”고 정의하였으며

 마리아의 종 대수도회 총장은 “마리아의 종 제 3회원의 참된 모델”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두 개의 영성적 타이틀안에 하느님과 동정 성모 그리고 그에게 맡겨진 백성의 봉사에 온전히 모든 삶을 바친 복자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1821. 5. 14- 1893. 7. 13) 생애가 그려져 있다.
갈레아짜 본당 직무 41년간, 복자 페르디난도 마리아는 사제생활의 가장 아름다운 덕을 증거하였다.

열렬하고 지성적인 설교, 온갖 희생을 감수하는 애덕, 영적지도, 그리고 고해성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인간 구원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 보였다.

 준임 수난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고통의 동정녀께 대한 애정어린 등을 통하여 서영께서는 그를 통하여 교회 안에 갈레아짜의 마리아의 종 수녀회를 일으키셨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 사제”에 대한 기억은 역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남아있다.

 많은 신자들은 갈레아짜 본당 성당 내에 안치된 그의 무덤을 참배한다. 여기서 얻는 많은 은총들은 그의 전구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1999년 10월 3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다.